6월 민주주의 꽃이 피다 (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13일 자정,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군은 하숙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 되었습니다. 민주추진위원회의 지도위원이였던 박종운의 소재파악을 위해 그의 후배인 박종철 군을 연행한 것.

하지만 박종철 군은 박종운의 소재를 순순히 대답하지 않자, 경찰은 잔혹한 폭행,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고, 그는 14일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숨졌습니다.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고. 경찰은 사건을 덮기 위해 유가족의 동의없이 시신을 화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보도와 최환 부장 검사의 시신보존명령으로 그 날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이같은 정부의 비도덕성에 분노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박종철 군의 추모식이 , 3월 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등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고문치사 사건직후 정부는 “대공경찰의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는…” 사건을 끊임없이 축소, 조작 은폐했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정부의 축소 은폐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민주화 요구와 함께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은 입학해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오직 억압박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6월 민주주의 꽃이 피다 (2) 6월 민주항쟁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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