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주의 꽃이 피다 (2) 6.10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 군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사건 직후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은폐했지만 동아일보의 보도와 최환 부장 검사의 시신보존명령으로 그 날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정부의 비도덕성에 분노했고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개헌과 고문추방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시한 채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정부는 대신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 보장을 약속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주도한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정치적 반대세력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중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했습니다. (대공경찰의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가담한 것처럼 축소은폐)
 5월 23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 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화’후 시위가 벌어졌고, 이 날 이한열 열사는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종창이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는 이한열을 부축한 장면을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했고, 외신에 실리면서 독재정권의 잔혹한 무력진압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시위 선두에서 앞장서다 전경의 최류탄을 맞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는 5.18 민주화 운동을 보며 학생운동 투신을 결심했던 학생운동가 였습니다. 6월 민주주의 꽃이 피다 (3) 민주주의의 꽃이 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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